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호네커 (문단 편집) === 전후 장기 집권 === 석방된 그는 곧 소련군에 소속된 독일 공산주의자들과 합류했는데, 당시 소련군에 소속된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그들의 점령 지역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 소련 국내에서 훈련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는 자유독일청년단(Freie Deutsche Jugend; FDJ)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 되어,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단장을 지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99px-Bundesarchiv_Bild_183-23724-0001%2C_Berlin%2C_FDJ-Aktivtagung%2C_Erich_Honecker_spricht.jpg|width=450]] ▲ FDJ 시절의 호네커. 1946년에 찍힌 사진이다. 1946년,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동독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소련의 압력으로 통합, 신 정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을 결성하도록 막후에서 힘썼다. SED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급속히 성장했고, 1967년에는 동독의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의 후계자로서 주목받았다. 1971년 SED 당수와 국가평의회 의장을 겸임하게 됨으로써 그는 당과 정부를 모두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57000-0512%2C_V._Parteitag_der_SED%2C_Honecker_spricht.jpg|width=350]] ▲ 1958년, 제5회 SED 전당대회 당시 호네커의 모습. 뒤에 있는 사람이 그의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다. 1970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에게 울브리히트 축출을 건의했고 결국 이듬해에 정치국원 13명과의 연명을 통해서 이를 관철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울브리히트의 뒤를 이어 사회주의 통일당의 제1서기로 선출되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1976년 10월 29일, [[발터 울브리히트]]의 후임자였던 퇴역 [[육군]][[대장(계급)|대장]] 빌리 슈토프 [[장군]]이 집권 3년만에 물러나면서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하면서 당수와 국가원수를 모두 독점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다.[* 스탈린 사후 소련이 세계 각국에 요구했던 것이 당수와 국가원수 혹은 정부수반의 분리 운영이었다. 이에 따라 불가리아는 벌코 체르벤코프가 제1서기와 수상을 독점하다가 제1서기에서 축출되었고 헝가리에서도 마차시 라코시가 수상과 서기장을 겸임하다가 수상에서 해임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도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죽은 후에 서기장과 대통령을 분리하여 안토닌 노보트니가 서기장을, 안토닌 자포토츠키가 나누어서 승계해야 했다. 그 중국조차도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고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만 맡았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 스탈린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면서 이런 규제는 완화되었다.] 호네커의 통치 기간 [[동독]]은 '''상대적으로 억압적인 국가 중 하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유럽]]의 [[소련]] [[위성국]]들 중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누렸다. 그는 [[서독]]과의 무역 및 관광 교류를 증진시켰고[* 아래에서 보듯 호네커도 [[이산가족]]이었던 게 컸다.], 그 대가로 '''서독의 대대적인 경제 원조'''를 받았고, 이를 통해 1980년대에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이 잇따라 외채문제에 허덕이며 경기침체에 시달렸을 동안 동독만큼은 외채에서 자유로울수 있었다. 호네커 시절 동독이 공산권 국가 중에 가장 잘 살았던 것은 서독에서 엄청난 규모의 원조를 퍼주었던 부분도 컸다.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등 [[소련]]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었다. 의외로 공산권 국가 지도자들끼리는 관계가 삐거덕 거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호네커는 소련 지도자는 물론이고 다른 공산권 국가 지도자들과 두루 원만한 편이었다. 일단 동독이 공산권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는 인식이 있어서 공산권에서도 제법 목에 힘주고 다닐 수 있었다. 독일의 다른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 사생활 영역은 복잡한 편인데, 그래도 라이벌인 [[독일연방공화국]]의 총리를 지낸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 출신 [[빌리 브란트]]나 [[게르하르트 슈뢰더]]보다 난잡하지는 않았다. 그는 총 세번 결혼을 했고, 세번의 결혼 생활 이외에도 다른 여자와 외도하여 낳은 [[사생아]] 자녀가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82px-Bundesarchiv_Bild_183-1984-0601-046%2C_Berlin%2C_Besuch_Kim_II_Sung_in_der_DDR.jpg]] ▲ [[베를린]]에서의 [[김일성]]과 호네커. 둘은 1912년 생 동갑내기였고, 1994년 같은 해에 죽었다. 김일성과 상당히 돈독한 사이로, 자신이 직접 북한에 2번 다녀왔으며, 김일성도 동독에 다녀와서 3차례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서로를 각각 유럽과 아시아의 공산주의 전초기지라고 추켜세우면서 경제, 과학, 교육 분야 협력을 확대했으며 김일성은 호네커는 자신과 동갑내기 친구라고 특별한 우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호네커는 남한의 위상이 올라가자 북한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 [[김영남]]이 직접 방문해서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지 말아달라고 읍소함에도 정치국 회의에서 결정할 일이지 서기장의 권한 밖이라고 둘러 거절하고 끝내 참석했으며, 남한과의 수교까지 모색하였으나 그전에 동독이 붕괴되면서 무산되었다.[* 호네커는 1985년 서울 올림픽 경기에 참석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이때부터 남한과의 수교를 검토했던 걸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